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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fine dining

에빗 EVETT 런치 - 흔하지 않은 미슐랭 레스토랑 / 미슐랭 1스타 / 한식 재료의 퓨전 프렌치 / 채광 좋은 코스 요리 / 역삼 강남

by 캐니킴 2021.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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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간에도 유명도는 상이하곤 하다. 한국에 단 2곳뿐인 3스타는 당연히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1~2스타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런데 이 유명도가 꼭 정확하고 같은 기준으로 평가가 되는지는 다소 의문일 때가 있다. 음식의 맛, 경험의 즐거움과 친절도, 가격대와 위치가 통상적인 기준일 테고, 덧붙이자면 사진이 잘 나오는 레스토랑이 유명하기에는 더 편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도 맛있고 즐거운 경험이 가득한 데다 가격대와 위치까지 완벽한 곳이 있는데, 아직 유명하지 않다면? 보석을 발견한 것과 다름없다. 짝꿍과 나는 유독 그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아주 걸맞은 곳을 찾아냈다. 덕분에 뜻깊은 1주년 다이닝을 이 곳에서 하기로 결정했다!

 

선입견을 없애고자 메뉴를 주진 않지만 코스 요리를 다 먹고 나면 재료가 그려진 귀여운 그림을 선물로 주는 곳, 한국에서 자라고 난 재료를 활용해 예상이 안 되는 재미있는 요리를 잔뜩 내오는데 아직 유명하지는 않은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에빗이다.

 

기본 셋팅. 금주 중이라 일단 산펠레그레노를 시켜본다.

 

요새 다이어트한다고 런치만 다니는 중이라 (안 갈 수는 없다 암암 그건 옵션이 아님) 에빗도 런치 코스로 갔다. 런치는 단일 코스이고 1인당 75,000원이다. 직전 주에 다녀온 임프레션 런치가 인당 약 13만 원 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합리적인 가격이다. (물론 2스타와 1스타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에 와인 등의 바틀을 주문할 수도 있지만, 요리에 맞추어 페어링 옵션이 주어진다. 전통주로 이루어진 알코올 페어링이 인당 4만 원이고, 술을 안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논알콜 페어링도 3만원에 준비되어 있다. 나는 무려 금주를 2주 넘게 진행 중이므로 (장하다 장해) 논알콜 페어링을 시켰고 짝꿍도 흥이 안 나니까 같이 논알콜을 주문했다. (사실 짝꿍은 나를 위해 그간 알콜 페어링을 했던 것... 고마워 짝꿍)

 

그런데 옆 테이블을 보니 알콜 페어링에는 우리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제주 오메기술이 나오더라! 오메기술을 아는 곳이라면 맛집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에 금주 끝나면 꼭 알콜 페어링으로 한 번 더 와야만 하겠다.

 

막걸리 전병 애피타이저

메뉴판을 주지 않아 이름을 알 수 없어서 대강 기억을 더듬어 써 보자면, 첫 번째 애피타이저는 미니 전병이다. 보통 애피타이저가 바삭하거나 상큼하다면, 이건 전병답게 떡같이 쫀득한 식감이라 특이했다. 막걸리로 만든 전병이라 하얗고 그 위에는 다양한 야채가 올라가 있다. 

 

동치미 얼음과 금태 요리

두 번째는 동치미 얼음이 가미된 금태 요리이다. 일단 동치미로 얼음을 만들어서 그걸 또 갈아서 눈처럼 데코한다는 발상부터가 굉장히 독특했다. 솔직히 그래 봤자 얼음이니 밍밍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동치미 맛이 또 잘 살아 있어서 놀랐다. 금태를 조금씩 잘라 동치미를 얹어 먹으니 느끼함이 없어 좋았다. 그리고 얼음이기 때문에 동치미 맛이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느낌도 좋았다.

말린 사과 소스가 정말 맛있던 키조개

다음은 키조개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보다 크기가 꽤나 큰 키조개 디쉬에 나온다. 조갯살이 조개 육수에 들어 있는데 이 디쉬의 진미는 그 밑의 소스이다. 말린 사과와 튀긴 이스트가 깔려 있는데 이게 진짜... 대박이다.

 

생긴 건 된장 가루 마냥 생겨서는 고소하면서도 달짝지근하고 조개 육수랑 조갯살과도 잘 어우러 진다. 너무 맛있어서 이것만 더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무난했던 채소로 쌓인 수비드 광어 조각들

약간 징그럽게 생긴 이 친구는 수비드 광어이다. 깻잎...이었나 하여튼 그런 채소로 광어를 토막토막 쌓아서 원을 만들었다. 역시 발상도 신기하고 생긴 것만 봐서는 맛도 구성도 예측이 안 되는 디쉬였다. 다만 향이나 소스가 기억에 크게 남지는 않고 무난한 디쉬였다.

클렌저 식혜 셔벗

메인이 나오기 전 입가심을 위한 클렌저로는 식혜 셔벗이 나온다. 컨템포러리 한식을 지향하는 만큼 식혜를 활용한 셔벗이 나왔는데, 식혜 맛이 강하지는 않다. 아래쪽에는 시럽이 깔려 있다. 

 

논알콜 페어링의 수박 주스

이건 두 번째 논알콜 페어링으로 나온 수박 주스. 음... 개인적으로 수박을 굉장히 불호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좋아하지는 않는 주스였다. 수박... 싫어요...

 

메인 디쉬 - 돼지 갈매기살과 제철 두릅

엄청나게 충격적이었던 메인 디쉬! 돼지 갈매기살 위에 두릅 등 향이 강한 채소가 다양하게 얹어져 나온다. 채소 양이 굉장히 혜자여서 고기를 다 먹을 때까지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갈매기살도 너무 맛있었고, 무엇보다 두릅과의 조화가 진짜 좋았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육류가 메인 디쉬로 나오면 사이드 양이 부족해서 마지막에는 느끼한 경우가 많았는데 에빗은 그렇지 않은 점이 좋았다. 게다가 두릅 향도 너무 부담스럽지 않을 수준으로 은은하게 조화로워서 마지막까지 아껴 먹느라 더 넉넉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메인 디쉬의 사이드 - 돼지 머릿고기살 타르트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메인의 맛도 있지만, 함께 나온 타르트의 비주얼이다. 보다시피 공룡 머리뼈 같은 어마 무시한 비주얼의 위에 얹어져 나오는데 이게 모형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무튼 파격적인 비주얼의 이 타르트는 돼지 머리 고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파격적인 생김새만큼 맛도 파격적이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디저트 1 - 밀랍 아이스크림과 흑미 케잌, 백년초 아이스

다음으로는 디저트가 나온다. 밀랍 아이스크림 아래에는 흑미 케잌이 가려져 있고, 주변에는 백년초 얼음이 소소소 떨어져 있다. 밀랍이라고 하셔서 '뭐야 먹을 수 있는 건가?!' 했는데 우려와는 달리 보통의 바나나 아이스크림 같았다.

 

이 디저트는 아래의 흑미 케잌이 진짜 맛있었다. 쉬폰 케잌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달달한 디저트류도 딱히 흥미가 없는데, 케잌이라기 보다는 보송송한 떡 같은 식감의 케잌과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퍼서 먹으니 조합이 좋았다. 보통 디저트는 배불러서 다 못 먹는데 이건 삭삭 긁어먹었다.

스페셜 디저트 - 미역 케이크

원래는 디저트가 2종류가 나오는데, 우리는 (역시나) 내가 미리 서프라이즈로 주문한 스페셜 디저트가 나왔다. 미역 케이크인데 아 이거 진짜... 최고였다. (디저트 맛집 에빗) 미역이라고 해서 진짜 엥? 했는데 생각 외로 너무너무 맛있었다. 너무 달지도 꾸덕하지도 않고 적절히 고소하다. 주변에 뿌려진 미역 가루는 아마 미역 오일의 분자요리인 것 같은데, 같이 먹으면 입 안에서 따뜻한 느낌으로 사르르 녹는다. 멘트를 초코맛으로 써주시는데 그것과 함께 먹어도 맛이 상당하여 짝꿍과 나는 그마저도 싹싹 긁어먹었다. 진짜 디저트 최고존엄...

 

생일을 기념하는 분들이 많아 미역으로 케이크를 만드신 것 같아 이마저도 뜻깊다. 우리는 1주년이지만 내가 멘트를 'Happy ending at last'로 해서 헷갈리셨는지 전 날 기념일이 맞는지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멘트는 그간 갖은 풍파를 겪은 우리의 1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ㅎㅎㅎ (짝꿍 보고 있니)

 

참고로 이게 서프라이즈 디저트이다 보니 서빙해주시는 분이 '축하드립니다!' 하면서 전해 주시는데 그 때문에 옆 테이블이 스포 당하신 듯했다. 에빗에서 서프라이즈를 할 거면 되도록 이른 타임에 오도록 하자.

디저트 2 - 참기름 카라멜과 헛개나무차

정규 코스의 마지막 디저트로 참기름 카라멜과 따뜻한 헛개나무차를 주신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것이 깔끔한 마무리였다.

두루마리 선물
오늘 메뉴의 원재료가 가득 그려져 있다

다 먹고 나면 정말 마지막으로...! 선물이 있다며 두루마리(?)를 건네어 주신다. 오늘 먹은 메뉴의 원재료들이 가득 그려진 귀여운 그림이다. 코스가 시작할 때에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메뉴가 없는 대신, 다 끝나고 나면 이것들을 그린 그림을 주신다고 한다. 너무 귀여운 발상이다. 누가 그리시는 걸까? 다만, 런치와 디너가 같이 그려져 있어 내가 먹지 않은 것들도 있긴 하다.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정말 높았다. 단순히 음식을 먹었다는 느낌보다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는 기분이 강하다. 물론 맛있는 디쉬는 덤이다. 지나치게 각 잡힌 서비스는 아니지만 외국인이 한식을 재미있게 해석하여 설명해주는 묘한 재미와 더불어, 그렇다고 해서 어색하지도 민망하지도 않은 퀄리티가 만족스럽다.

 

평범하기 너무나 쉬운 메인 디쉬를 맛으로나 비주얼로나 가장 임팩트가 강했던 것도 좋았고, 느끼하기 십상인 디저트가 수준급으로 맛이 있던 것도 인상적이다. 다만, 논알콜 페어링은 큰 임팩트가 없을 뿐더러 수박 등을 활용한 주스가 나와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수 있을 듯 하다. 다음에는 꼭 알콜 페어링으로 먹어봐야지.

 

개인적인 기우였지만 아무래도 유명도가 덜한 1스타 레스토랑이다 보니 손님이 없어 너무 허전하면 어쩌지(?)라는 괜한 걱정이 있었는데, 이마저도 정말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이 많거나 입소문이 퍼지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이 종종 오는 곳 같았다. 꼭 기념일을 위한 커플이 아니라 가족 모임, 사교 모임 등으로 다양하게 오는 듯했다. 

 

채광도 좋아서 낮에 사진 찍기는 좋아 보였는데 (실제로 내 사진도 잘 나옴) 디너에는 종종 푸르딩딩하게 어두운 사진들이 많이 올라오는 것 같다. 다이어트가 끝나고 나면 디너로도 와 봐야지. 재방문 의사 30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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