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꿍이 미국에 가는 날 직전 마지막 다이닝은 항상 스시이다. 사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몇 번 그러기를 의식도 못한 채 하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 이유를 또한 생각해보니, 미국은 스시가 비싸기 때문이다. (단순)
다만 나는 아직 스시에 일가견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명한 스시야를 갔을 때에도 큰 감흥이 든 적은 없었다. 스시카나에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비단 맛뿐이 아니라 탁 트인 창 덕분에 환하고 시원한 분위기 덕이 더 컸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에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정말 '맛'으로 인상이 깊은 스시야가 생겼다. 처음으로 '아 여긴 주기적으로 와줘야 겠다' 싶을 정도였다.
스시산원의 세컨 브랜드 시리즈이며 깔끔한 데다 가성비가 비 오듯 떨어지는(?) 역삼역의 미들급 스시야, 스시산원 청이다.
스시산원 청의 런치는 자그마치 50,000원이다. 그냥 동네에 있는 곳도 아니고 나름대로 하이엔드 스시야인 스시산원의 세컨 브랜드인 데다가 강남에 위치했는데 이 가격이라니... 가히 충격적이다.
런치 끝자락 타임인 1시 반에 예약했는데 조금 늦어버려서 앉자마자 차완무시가 나왔다. 버섯이 들어갔는데 분명 트러플이 아닌데 묘하게 트러플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시간을! 잘 지키자!)
첫 번재 피스도 참돔이 나온다. 요새 다이어트를 하느라 탄수화물을 줄이고 있기도 하고, 이전에 스시산원 경에 갔을 때 정말 배가 터질 뻔해서 이번에는 시작도 전에 밥 양을 적게 달라고 요청드렸다. 참돔은 첫 피스답게 무난한 맛이었다. 샤리 향이 크게 강하지 않아 좋았다.
... 나는 분명 금주 중이지만 오늘은 짝꿍이 몇 주 넘게 미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므로 어쩔 수 없이(??) 맥주를 한 잔 했다. 물론 짝꿍은 건강검진에서 맥주 줄이라고 했으므로 페리에 드셨음.
두 번째는 잿방어다. 사실 '아니 두 번째부터 방어라니? 우와' 하며 먹었다. 개인적으로 스시 먹을 때 와사비를 꼭 더 얹어서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스시산원 청은 기본적으로 와사비를 안 주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먹어보니 알겠더라. 스시가 느끼함이 잘 조절되어 있고 담백하면서도 밍밍하지 않아서 와사비가 필요 없었다. 내 스시에 다른 얹을 것은 필요 없다는 셰프님의 자부심이려나.
세 번째는 가리비다. 밥 양을 적게 하다 보니 가리비가 굉장히 커 보인다. 탱글 하니 씹는 맛이 좋았다. 여기까지도 나와 짝꿍은 시간이 부족할까봐 냠냠 나오는 대로 먹었다. 그리고 셰프님도 우리가 먹는 족족 스시를 놓아주셨다. 안 그래도 천천히 먹는 우리인데 혹시나 시간이 부족할까 우려되어 그랬는데, 이러니까 스시 맛을 잘 못 느끼겠어서 다음 피스부터는 그냥 원래대로 천천히 먹었다. (대충 다른 팀들과 진도가 비슷해지기도 했고)
다음은 한치다. 오징어류를 크게 좋아하지 않아서 한치 스시도 딱히 좋아하지 않는데, 스시산원 청의 한치는 한치 같지 않고(?) 얇고 괜찮았다.
참치 속살이다. 참치는 언제나 옳다. 최근에 단백질 섭취한답시고 혼자 참치를 많이 시켜 먹는데 물론 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참치였다. 맛있다.
대망의 참치 뱃살이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진짜 맛있더라. 요새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참치 잡는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데, 잡은 참치의 속 살에 가격을 메길 때 최고 등급이 나오는 색과 언뜻 비슷하다. 참치가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는 표현 진부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진짜기 때문에 존재하는 말이었다. 사르르 녹는다.
중간에 보리멸 덴뿌라가 나왔는데 먹느라고 사진을 못 찍었다. 아래 단새우와 우니 사진을 보면 저 멀리(...) 접시에 보이는 친구다. 튀김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건 진짜 맛있었다. 일단 딱 입에 넣는 순간 깨끗하고 좋은 기름으로 갓 튀긴 제대로 된 튀김이라는 느낌이 팍 온다. 안의 생선살도 보드랍고 맛있어서 셰프님께 생선 이름을 되물었는데, 요 작은 게 한 마리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맛있는 생선 한 마리를 통째로 좋은 기름에 튀긴 덴뿌라인 것이다.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다음은 단새우와 우니이다. 하나씩은 꼭 나오는 우니! 특이했던 것은, 다른 스시야에서는 이 우니 스시가 제일 기억에 남곤 했는데 여긴 꼭 그렇진 않았다. 그렇다고 우니가 맛이 없던 것은 아니었고, 참치 뱃살이나 덴뿌라 등 다른 것들도 특출 나게 맛있어서 그런 듯하다.
아홉 번째 피스는 전갱이다. 앞서 워낙 자극적이고 맛이 강한 스시들을 먹다 보니 전갱이 같은 무난한 피스는 사실 기억에 잘 안 남는다. 그래도 비리거나 맛이 없다는 기억은 없다.
이 타이밍에 따뜻한 국이 함께 나온다. 아무래도 향이 강한 것들을 다 지났으니 입 한 번 리프레시 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금태이다. 불에 약간 그을려서 훈연 향이 은은하게 난다. 큰 인상은 없지만 적당히 괜찮았다.
그리고 중간에 하나를 안 찍었네;; 청어가 빠져 있다.
마지막 스시 피스로 아나고가 나온다! 구운 걸 거의 바로 얹어 주셔서 굉장히 뜨겁다. 뜨거우니 조금 있다 먹으라셔서, 첫 번째 팀에게 먹어도 된다고 하실 때를 맞추어 먹었는데도 뜨거웠다. (앗뜨) 다만 소스라던가 살이 너무 맛있어서 그 뜨거움마저 맛으로 승화된 것 같았다. 간만 세게 해서 구색을 맞춘 아나고와는 다르게 살이 무너지는 맛도 맛있었다.
스시 이후에는 역시나 후토마끼가 나온다! 실시간으로 셰프님이 후토마끼를 마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데 뭔가 엄청나게 많은 재료가 들어가길래 뜨악했는데 막상 잘라놓고 보니 그렇게 크지 않다?
으레 그러하듯 이때 즈음에는 배가 불러서 맛이고 뭐고 느낄 수 없는 지경이다.
계란!! 난 이걸 너무 좋아하는데 이런 내 입맛이 초딩 입맛이고 싼 것을 좋아하는 군,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작 스시가 발현될 때 즈음의 일본에서는 생선이 흔하고 계란이 귀해서 이게 더 고급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렇든 말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괜히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
아무튼 난 계란의 폭신함과 달큰함을 너무 좋아하는데, 스시산원 청의 계란도 맛났다. 촉촉하고 달짝지근해서 좋았다.
디저트로는 녹차 아이스크림과 팥이 나온다. 적당히 깔끔하게 입가심하고 마무리하기에 좋다. 생각해보니 오마카세에서는 디저트로 녹차 아이스크림이 자주 나오는 듯하다. 팥은 남겼고 아이스크림은 다 먹었다.
개인적으로 가 본 스시야 중 가장 자주 가게 될 것 같은 곳이다. 엄청나게 하이엔드여서 특별한 기념일을 위해 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어도, 간단히 기분 내고 스시가 먹고 싶을 때 생각 날 것 같다. 전반적으로 구성이나 맛이 굉장히 깔끔하고, 인테리어와 분위기 또한 그렇다. 2층이긴 하지만 통창이 되어 있어 햇볕도 잘 든다. 무엇보다 샤리와 스시의 간이 적절하게 잘 되어 있다. 좋은 튀김이 느껴지는 덴뿌라나, 갓 구워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아나고나, 전체적으로 기본에 충실하다는 느낌이다. 밥 양도 처음부터 조절을 했더니 견딜 만했다.
스시산원 경을 디너로 간 적이 있는데 경 대비 청이 더 좋았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위치적 차이점도 있고 런치와 디너의 차이도 있겠지만은, 깔끔하고 담백한 구성에 피스 하나하나의 맛이 알찬 것은 청이 압도적이다.
너무 찬양만 해 놓았나 싶긴 하지만 정말 그랬기 때문에 민망하진 않다. 게다가 최근에 갔던 나름 유명한 스시야에서 굉장한 실망을 하고 온 터라 (판교 스시쿤... 부들...) 비슷한 미들급 스시야 런치에서 이런 감동을 받았다니 감회가 새롭다. 꼭 다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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