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라면 응당 상상하는 이미지가 있다. 삐까뻔쩍한 인테리어에 각 잡힌 직원들, 무언가 도회적인 분위기 등이 그러하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어딘가 콧대 높게 느껴지는 곳을 그려낸다. 맛도 그러하다. 솔직히 나는 엄청나게 맛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전문가들이 스타를 줬다고 하니 '맛있나보다...'할 때도 있다. '내 입맛이 저렴한가보네' 하거나.
반면, 이런 편견과는 달리 분위기가 따뜻하고 코지하며 맛도 '와 이거 진짜 맛있네!' 감탄하는 곳도 있더라. 그런 곳은 왜인지 더 정감이 가고 괜히 진짜 맛집을 알아본 듯 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무려 청담에 위치했지만 코지한 분위기와 알알이 맛있는 요리가 인상적이었던 미슐랭1스타, 익스퀴진이다.
청담동 골목에 위치한 익스퀴진은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래서 자리가 많지 않고 예약이 힘든 듯 하다. 어찌어찌 짝꿍이 또 잘 예약해 주어 디너에 다녀왔다. 디너 8코스에 11만원 (이제는 12만원으로 올랐다) 으로 미슐랭 1스타 디너 가격 치고는 비싼 편은 아니다.
메뉴에 코스 별 요리가 쓰여있긴 하지만 솔직히 저것만 봐서는 뭐가 나온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이 날도 어김없이 와인과 함께 했다. 요새 와인샵 가면 자주 보이는 청년 중년 노년 시리즈(?) 와인인 Matsu 중, 중년(엘 레시오 el recio)을 데려왔다. Matsu는 일본어로 '기다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와인 라벨이 나이가 많을수록 숙성된 버전이다. 자주 보이는 게 궁금해서 마셔봤는데 스페인산이고 나쁘지 않았다. (가격대 대비는 더 괜찮은 와인이 많을 것 같다)
메뉴에는 Snacks라고 간단하게 써 있는 것이 실제로는 5종류의 애피타이저로 차례대로 나온다. (대혜자) 그것도 양이 엄청 쪼마낳게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인상 깊다.
첫 번째 애피타이저로 계란찜 같은 것 위에 캐비어를 얹은 요리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캐비어 맛은 아직도 잘 모르겠어서 그냥 짭조름한 게 올라간 부드러운 계란찜이군! 하면서 먹었다.
감태로 둘러싼 방어가 귀엽게 나온다. 접시가 멋있다. 이것부터 굉장히 맛잇었다. 요새 감태를 활용한 요리가 많이 나오긴 하는데 애피타이저로 나올 줄은 몰랐다.
소힘줄튀김 위에 한우육회가 얹혀 나온다. 크래커도 너무 기름지지 않았고 한우육회는 말해뭐해 맛있었다. 그냥 육회가 나온 게 아니라 다져져서 파 같은 야채와 섞여 나온다. 크래커 면적이 넓으니 저 육회를 스프레드마냥 조금 펼쳐 먹으면 골고루 발라지고 떨어질 걱정도 없이 먹을 수 있다. 이 조합도 굉장히 맛있었다.
나의 최애 에피타이저였던 푸아그라 만두이다. 나도 몰랐는데 나 푸아그라 좋아하더라(?!) 일산 르쁠라를 다녀온 후부터 푸아그라에 호감이 생겼는데 이 만두는 다른 느낌으로 맛있었다.
만두가 굉장히 따뜻하고 안에 육즙이 들어 있다. 만두피가 뭘로 만든건지는 몰라도 쫄깃하다. 다만, 피가 얇아 그릇에 붙어 떼기 힘들 수 있다. (터지지 않게 조심) 한 입에 넣지 못하고 베어 물 생각이라면 아까운 육즙이 흐르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이거 굉장히 보양식 만두같고 맛있었다. 또 먹고 싶다...
짝꿍은 우리 웨딩밴드를 자랑 중이시다. 손 예쁘다!
비주얼에 약간 놀란 마지막 애피타이저. 돌멩이처럼 생겨서 그런지 자기랑 비슷하게 생긴 돌멩이들과 함께 나온다. 숯마냥 유독 까만 애들이 튀김이다. 오징어 먹물을 잔뜩 넣은 반죽에 광어를 튀겼다. 찍어먹는 소스마저 손수 만드셨다. 저 멀리 보이는 주황색 케첩인데, 파프리카로 만드셨다고 한다.
이건 튀김이 굉장히 부드러웠다. 바삭! 이 아니라 사르륵-하고 녹아버리는 느낌의 가벼운 튀김이다. 속의 광어는 그냥 생선 튀김인데 (생선튀김 안 좋아함) 파프리카 케찹이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맛이라 케찹맛으로 맛있게 먹었다.
드디어 에피타이저가 끝났다! 본격 디쉬가 시작된다. 첫 번쨰는 단감요리이다. 감을 영어로 부를 일이 없어서 뭔지 몰랐는데 persimmon이라고 하나보다.
겉에 한가득 올라간 주황색이 얇게 썬 감이고 안에는 베이컨, 땅콩과 유자소스가 있다. 섞어서 먹으면 되는데 나는 비주얼을 망치는 게 괜히 죄송스러워서 감을 하나씩 집어 소스에 푸욱 눌러 먹었다. 상큼하고 맛있었다!
또 독특하게 생긴 사과요리가 나온다. 도저히 사과처럼 안 보인다. 저 신기한 소스가 사과로 만든 소스이고 아래에 사과가 잘게잘게 들어 가 있다. 솔직히 크게 임팩트는 없었다.
감자요리! 이것도 전혀 감자처럼 안 생겼다. 감자를 으깬 것이 뭉쳐 나오고 그 위에는 갈갈이 갈린 버터(?)가 잔뜩 얹혀 나온다. 스테이크 먹듯이 잘라서 먹으면 되는데 저 버터가 정말...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스르르 녹아버린다. 감자로 만든 것 중에 뇨끼랑 감자사리 빼고는 딱히 좋아하는 게 없었는데 이 친구는 버터덕에 맛있게 먹었다.
전복 스테이크가 나온다! 전복을 조금씩 잘라 소스에 찍어 먹으면 된다. 전복을 약간 짭조름하게 구웠다. 소스 옆에는 적양파가 있다. 가니쉬처럼 먹으면 된다.
기본 메인 디쉬로 오리가 나온다! 우리는 역시나 소고기 메인을 선호하지 않으므로 둘 다 오리로 먹었다. 가니쉬와 함께 나온다. 오리는 수비드를 한 건지 겉바속촉이 일품이었다. 양이 적어보이지만 앞에서 에피타이저 5종에 코스를 주르륵 다녀온 것을 생각하면 저 두 덩이가 생각보다 많다.
첫 번째 디저트! 무화과빵과 솔티티라미수 아이스크림이 나온다. 둘 다 맛있었다! 이 때 즈음에는 이미 너무 배가 불렀는데도 맛이 있었다는 기억이 있는 걸 보니 요리를 먹지 않고 그냥 커피랑 먹었으면 정말 맛있었겠다.
무화과빵은 작은 알갱이들이 느껴지는 식감이었고, 아이스크림은 티라미수향이 있다보니 흔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은 아니어서 좋았다. (생긴 건 그렇게 생겼는데)
완전 마지막 디저트로 귀여운 3종세트가 나온다. (저 접시 아까부터 탐나) 아주 작은 마들렌과 미니 슈, 그리고 초콜렛이다. 너무 배불러서 다 못 먹었다.
그리고 코스는 아니지만 화장실에서 너무 좋은 향이 나길래 찍어온 이솝 룸스프레이! 향에 굉장히 민감한 편인데 화장실에서도 셰프님의 센스를 느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파인다이닝이었다. 일단 디쉬마다 맛이 너무 좋고 독특한 구성인데다가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게다가 자리 개수도 적고 공간도 코지한 느낌이 강해서 화려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 왔다는 기분보다는 따뜻한 맛집에 온 기분이 더 크게 든다.
재미있던 것은 익스퀴진 셰프님의 말투가 특이하다(?) 보통 설명해주실 때에는 딱 각이 잡혀서 '~다' (다나까라고 하던가)체를 쓰곤 하는데, 익스퀴진은 '~요'체를 쓰셨다. 뭔가 반존대의 느낌?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는데 셰프님이 본인 자부심과 개성이 있는 분 같아 보여서 재미있게 느꼈다.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을 아직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여러 개를 더 가본대도 꽤나 맛있는 축에 속할 것 같다. 자리 개수가 적어 예약이 힘들지만 이 맛은 또 생각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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